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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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율리 김 / 최선 옮김
ISBN89-956903-1-3 08890 / 89-956903-0-5 08890(세트)
출간일2005년 8월 19일
페이지280
가 격18,000원
목차.
출판의 말
역자의 말
서곡
구름 한 점 없는 젊은 날을 노래하다
1812년의 노래들
깜챠뜨까의 노래
유행가를 부르다
여러 색깔의 노래들
친구-바르드들에게
역자의 주석
20세기 러시아 노래의 발달과 러시아 바르드 – 최선

[책소개]

한국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인, 율리 김. 바르드(음유시인)라는 낯선 이름으로 한국의 독자를 만난다. 자신의 시를 노래로 부르는 소비에트의 신생 장르인 음유시는 당대 소리낼 수 없었던 반체제 인사들의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그 당시 자신의 이름까지 잃어버린 채 활동해야 했던 율리 김이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다. 시선집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는 러시아 바르드 음악(음유시)의 대표자인 율리 김의 작품들을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차곡히 정리한 시노래 모음집이다. 이 책은 시와 노래를 결합시킨 러시아의 고유 장르인 바르드 음악의 특성을 살려 시집과 음악 CD가 함께 실렸기에 독자와 함께 노래하며 호흡할 수 있다.

[추천사]

율리 김은 스탈린 시대의 억압을 거부한 저항의 시인입니다. 율리 김은 힘겨운 삶을 때론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노래로 풀어낸 민중의 시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외롭게 노래할 때면 언제나 기타가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습니다. 러시아 4대 음유시인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그는 그래서 러시아 바르드(음유시인)의 전설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타 선율에 싣는 그의 문학적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대우, 경북대 교수) 고려인 2세 율리 김은 러시아 바르드 음악의 선두주자인 동시에 러시아 연극 및 영화계에도 널리 알려진 예술인입니다. 이번에 그의 음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율리 김의 무대가 그의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마련되는 것은, 잊고 있던 우리 정체성의 한 부분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율리 김의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공감대가 더욱 확장될 수 있길 바랍니다. (이상훈,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출판사 서평]

한국에서 러시아의 노래는 이제 낯설지 않다. 알라 뿌가쵸바의 “백만 송이 장미”가 번안되어 불려지고, “백학”이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이후 많은 러시아 노래들은 낯선 이방인의 노래라기 보다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유행가의 한 소절만큼 정감어리다. 비록 언어는 다를지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래가 아닌가. 그네들도 우리의 노래를 들으며 같은 느낌을 갖지는 않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러시아 바르드 음악 혹은 음유시(авторские песни, бардовский песни) 세계에 접근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시에 곡을 붙여 통기타로 노래하던 이 소비에트의 신생 장르는 시대를 노래로써 저항하던 숱한 예술가들의 유일한 숨통이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우리의 70년대 가수들과 닮아 있는가. 여기에 <러시아의 시와 노래>라는 시리즈의 기획 의도가 있다. 율리 김을 시작으로 오꾸좌바, 븨소쯔끼 등의 시와 노래를 통해 러시아인의 숨결을 좀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그들과 더불어 시대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 시인이 율리 김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고도 기쁜 일이다. 그는 러시아 음유시 장르의 제1세대로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실로 러시아 시와 음악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오꾸좌바, 븨소쯔끼, 갈리치 등과 더불어 러시아 음유시 장르는 율리 김과 과거와 현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인물의 시와 노래를 통해 러시아의 정신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본 기획 출판의 첫번째 이유이다.

또한 율리 김이 빅또르 최와 마찬가지로 바로 한국인이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불행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인이라는 의식조차 모르고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한국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년에라도 조국의 땅을 밟아 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것이 우리가 율리 김의 시를 번역하고 초청하여 그의 시와 노래를 이 땅에 알려야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그의 번역 시집의 출간과 더불어 우리는 그를 초청하여 초청 공연을 갖는다. 이는 현 러시아의 유명하고도 역사적 시인의 초청 공연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조국을 그리워하는 재러 한인 예술가의 죽기 전 조국 땅을 밟아보고자 하는 염원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율리 김은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이며, 현재에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노래는 현재 러시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러시아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의 시와 노래가 아직 그의 모국인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오히려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기회에 그의 존재가 그의 예술과 더불어 한국인의 가슴 속에 아로 새겨지길 바란다.

[책 속으로]

아마도 정말
내가 광대하면
슬픔 한 방울 줄겠지, 누군가에겐.
그러니까
꼭 그만큼
세상에 늘어나겠지, 기쁨 하나가! (<어릿광대> 중)
슬퍼마, 내 좋은 친구,
노래해 나랑, 차라리, 노래해,
슬퍼마, 왜그래, 왜그래,
잊어버려, 걱정일랑,
노래해- 모든 것이 지나가게
노래만 해!
노래해, 심지어 심하게
재능 없어도, 가성 못내도
아직 알아듣지들 못해도
모든 이웃들 도망가도
한 마리 새봄 고양이
그래도 듣겠지, 창턱에서-
아무렴 어때, 그냥 노래해! (<오이, 얼마나 좋아!> 중)

저자소개
스딸린의 철의 장막 속에서 1938년 율리 김이 두 살 때 아버지 김철산은 ‘민중의 적’이라는 죄의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였다. 러시아인이었던 그의 어머니 니나 발렌찌노브나 역시 한국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8년의 유형을 살아야만 했다. 율리 김은 대학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그 비밀을 알게 되었고, 스딸린 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와 노래, 인권 운동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동시에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의 직업도 버려야만 했고, ‘김’이라는 자신의 성도 버리고 ‘미하일로프’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지만, 체제가 그의 목소리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의 금지된 시는 노래가 되어 암울한 소비에트 시대에 희망과 자유를 심어 주었다. 밝고 유쾌한 그의 노래는 차가운 러시아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한국에는 2003년 KBS <한민족리포트>를 통해 알려졌고, 2005년 10월 방한하여 내한 공연을 갖는다.
1936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출생.
1937-38년 아버지 김철산은 형법 58조항에 따라 처형, 어머니 니나 발렌찌노브나도 같은 죄목으로 5년 강제수용소, 3년 유형에 처해졌다가 1954년 복권됨.
1954-59년 모스크바 국립 사범대 역사인문학부에 입학, 대학시절 이미 시와 노래로 인권 운동을 시작.
1959-61년 졸업 후 깜챠뜨까 야간 학교의 교사로 발령되어 근무함.
1962-68년 모스크바 학교에서 교사로서 근무함.
1969-반체제 운동으로 인해 교사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모든 예술 활동을 저지당함. 이름을 율리 미하일로프로 바꾸어 활동.
1963년 이후 영화 작업에 참여. 그의 노래가 50여편의 영화와 40여편의 연극에 삽입됨.
1974년 이후 극작가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자신이 직접 쓴 20여편의 연극이 현재 러시아 전역에서 상연 중. 2편의 영화 <비 온 뒤 목요일에>, <하낫 둘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가 1985, 87년에 유좁스끼 감독에 의해 영화화.
1985년 자신의 이름 율리 김으로 활동을 재개.
1986년 이후 해외에서 활동.
1998년 <황금 오스따프>상 수상, 1999년 <불랏 아꾸좌바>상 수상
1987년 영화인 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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