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 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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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글) 강병융
197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학사, 석사, 박사 수료
모스끄바 국립대학교 박사 (러시아 문학)
2002년 『정신과표현』 신인작품 공모에 「낙찰」이 당선되어 등단
연작소설 『상상인간 이야기』 (2005), 단편소설집 『무진장』(2006),
연구서 『자먀찐의 “우리들”연구』(2010, 러시아어),
장편소설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2012) 출간
2009년 제8회 한국문학번역신인상 수상

책 속으로
『알루미늄 오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모니터링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읽은 한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집에서 거의 의무감(!)으로 이 작품을 읽던 중, 눈가에 맺힌 ‘아주아주아주’ 작은 눈물 한 방울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그는 어떤 대목을 읽다가 갑자기 웃(기면서 슬)픈 감정이 생겨나는 바람에 ‘아주아주아주’ 작은 눈물 방울 하나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눈 밖으로 나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정말 알루미늄 오이는 열매를 맺지 않는 걸까? 그것을 알고 싶다면, 정말 알루미늄 오이를 심어봐야 한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어떡해야 알루미늄 오이에서 열매가 날까? 정말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는 걸까? 원래 알루미늄 오이에서는 열매가 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애를 쓰는 것은 분명 잘못이 아니다. 애는 어쩌면 사랑이고, 미래이고, 몸부림이다. 그래서
애는 소용없는 일이 되는 경우보다 소용 있는 일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열매가 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뻔한 알루미늄 오이를 고생 고생해서 땅에 심는 것은 정말 헛수고일까? 세상에 헛수고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했던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사실만이라도 알게 될 테니까.(328면, Outro 중)

빅또르는 그 순간, 자신이 유리벽 속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밖이 환히 다 보여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보이는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만질 수도 없었다. 그 안에서, 유리벽 속에서 아무리 자유로운 척 해도 그건 그저 유리벽 안일 뿐이었다. 유리벽 속의 삶에는 진정한 자유란 없는 법. (121~122면)

안 좋은 기억들은 먼지가 아니다. 그래서 쉽게 털리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생각들은 연필로 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정말 그럴지도. 이유는 없고,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 그냥. 그렇게!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전처럼, 엄마처럼, 그리고 또 누군가처럼. 그래서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것.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는 것. 그 이유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한 것. 뭐, 그런 것. 것. 것. 것. (221면)

2005년 마지막 날, 승희는 모스끄바 소재 뻬쩨르부르그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모스끄바에 뻬쩨르부르그 역이 있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지만, 모스끄바에는 모스끄바 역이 없다. 대신 뻬쩨르부르그 역이 있다. 뻬쩨르부르그에는 뻬쩨르부르그 역이 없고 대신 모스끄바 역이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도착할 곳을 역의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이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보다는 앞으로 갈 곳에 방점을 찍는 것, 지금의 나보다는 앞으로의 나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승희가 생각한 매력의 이유였다. 그것이 승희를 쉽게 떠나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렇게 승희는 2005년 마지막 날, 그 매력을 음미하며 찬바람 위 승강장에 서 있었다. (2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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