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과연 계몽되었는가?”
“지식은 곧 계몽인가?”
레프 톨스토이의 희곡 『계몽의 열매』(Плоды просвещения, 1889)는 귀족 가문이 벌이는 영매술 실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자 희극으로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이 유행처럼 받아들였던 심령주의(spiritualism), 그리고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자칭 ‘계몽되었다’고 여긴 귀족들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조롱한다. 1891년에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초연되어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은, 작가의 후반기 사상 – 도덕적 갱신,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등 – 이 극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코믹하게 표현되면서도, 사회 구조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수작이다.
책 속으로
레오니드 표도로비치: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흔한 일이기도 한데, 우리 집 식당에서 일하는, 시골에서 온 하인도 알고 보니 영매였지 뭡니까. 요전에는 심령회를 열던 중에 부른 적도 있었어요. 망령을 불러내 소파를 옮기는 데 열중하다 보니 다들 그 친구가 왔다는 걸 깜빡했죠. 그사이 그 친구는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심령회도 다 끝나고 캅치치도 깨어났는데, 그 친구가 있었던 저쪽 방 구석에서 갑자기 빙의 현상이 시작되는 거예요. 책상이 흔들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타냐: (방백) 내가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을 때 얘기잖아.
– p. 45
레오니드 표도로비치: 그거는 작년 일이잖소. 그때는 그러마 했지만, 지금은 안 되는 일이거늘…
농부2: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작년에 그리 말씀하셔서 저희는 서류도 준비하고 돈도 이렇게 모아 놨는데.
농부3: 제발 사정 좀 봐 주십쇼, 나리. 저희가 땅이 모자라서 소는커녕 닭 한 마리 풀어놓을 데도 없습니다요.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부디 저희를 굽어살펴 주십쇼, 나리!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 p. 52
농부1: 아니, 집사 양반,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그러니까 작년에 이 댁 주인 나리께서 돈을 나눠서 내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도 그렇게 하기로 하고 우리가 이렇게 대표로 온 겁니다. 근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 큰 돈을 한꺼번에 내라고 하시는데 우리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 p. 54
안나 파블로브나: 선생님은 제가 흥분하면 안 된다고 하시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제가 두 달째 여동생 얼굴도 못 보고 있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사람도 안 만나고 있는 거 선생님도 아시죠? 근데 갑자기 쿠르스크에서, 그것도 디프테리아가 돌고 있는 바로 그 쿠르스크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우리 집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잖아요!
– P. 79
타냐: 세 번째가 젤로 중요해. 잘 기억해. 서류가 책상에 떨어지면 내가 종을 울릴 거야. 그러면 자기가 곧바로 두 팔을 이렇게 벌리는 거야. 더 크게 벌려서 아무나 잡아. 옆에 앉은 사람 아무나 잡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잡은 사람을 꽉 쥐는 거야. (깔깔 웃는다) 주인 나리든 주인마님이든 상관하지 말고, 그냥 꽉 쥐고 절대로 놔주지 마. 그리고 잠결에 그러는 척 이를 갈든지, 아니면 으르렁거리든지, 이렇게… (으르렁거린다) 그러고 나서 내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잠에서 깨는 척하는 거야. 알지? 기지개 켜면서 일어나는 그런 거 있잖아… 이제 알겠지?
– p. 189
교수: (헐떡이며) 잠시만요, 잠시만. 이건 완전히 새로운 현상입니다. 소환된 망령의 에너지가 아니라 영매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어요. 아무튼 지금 잉크병을 여시고 펜을 종이 위에 올려놔 보세요. 영매가 분명 뭔가를 쓸 겁니다.
– p. 218
교수: (단호하게) 사모님께선 지금 이 아가씨와 따님이 뭔가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어제 우리가 다 같이 본 불빛도, 처음에는 체온이 떨어졌다가 두 번째에는 체온이 올라갔던 현상도, 또 그로스만의 격한 반응과 떨림도 죄다 이 아가씨가 꾸며냈다는 건가요? 그건 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 아닙니까, 사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엄연히 있는 겁니다. 부단한 연구와 충분한 이해가 선행돼야만 말할 수 있는 것들 말이죠. 아주 심각하고도 또 심각한 것들이 있는 겁니다.
– p. 263
출판사 서평
레프 톨스토이의 희곡 『계몽의 열매(Плоды просвещения)』는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귀족들은 이성과 계몽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미신과 탐욕에 매달려 있었고, 톨스토이는 이를 풍자극의 형식으로 드러내며 사회적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 이 작품은 단순한 고전 희곡을 넘어 여전히 현재적 울림을 가진다. ‘우리는 과연 계몽되었는가?’라는 물음은 근대 러시아만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 합리와 진리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이해관계와 위선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톨스토이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당대 유행했던 무속과 미신에 대한 숭배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계몽’이라는 단어는 마땅히 진리와 이성을 의미해야 하지만, 풍자와 냉소의 언어로 회자되며 우리 시대의 민낯을 비추고 있다
톨스토이가 제목에서 언급한 ‘계몽의 열매’는 허위와 위선, 퇴폐와 무지, 신비주의 등으로 점철된 썩은 열매였다. 이에 작가는 진정한 계몽이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됨을 배우지 못한 농민들의 입을 통해 일깨워준다.
이번 한국어 번역 출간은 톨스토이 문학의 또 다른 면모를 국내 독자에게 소개하는 의미 있는 시도다. 장편소설의 대작가로만 알려진 톨스토이가 짧지만 날카로운 희곡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를 접하는 것은, 고전이란 왜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계몽의 열매』는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이지만, 그 웃음 끝에 많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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