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글) 세르게이 도블라또프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Sergei Donatovich Dovlatov)는 러시아의 단편 작가이다. 1972년부터 에스또니야의 신문사 <소비에뜨 에스또니야>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산문을 썼으나,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문학과 거리가 멀었던 그의 작품은 소련 잡지에 게재되지 못하였고, 결국 그는 비밀리에 출판된 작품 때문에 소련 기자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1978년 정부의 박해로 인해 빈으로 망명하여 뉴욕에 정착한 후, 산문 ‘보이지 않는 책’(1977), ‘솔로 온 언더우드’(1980), 중편 ‘타협’(1981), ‘수용소’(1982), ‘국립공원’(1983), ‘외로운 사람들의 행진’(1983), ‘우리 집안 사람들’(1983), ‘직업’(1985), ‘외국여자’(1986), ‘여행가방’(1986), ‘작가 수첩’(1990), ‘지점’ (1990) 등 조국에서 발표하지 못했던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로써 영미권 문학계에서는 노벨상 수상자인 브로드스끼와 솔제니찐 만큼이나 유명한 러시아 작가가 되었다. 도블라또프는 50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쳤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에서도 주목을 받아 1990년대 이후 인기를 얻었으며, 영어, 독일어, 덴마크 어, 일어 등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오늘날 도블라또프의 작품들은 러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책 속으로
일주일 후에 나는 벌써 짐을 싸고 있었다. 다 싸 놓고 보니 가방 하나로도 충분했다.
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 나이 서른여섯이 아닌가. 그 서른여섯 해 가운데 18년 동안 돈벌이를 하며 살았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 물건을 사고는 했으니, 그렇게 사들인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달랑 여행 가방 하나다. 그것도 코딱지만한 가방으로. 아니, 내가 거지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지경이 돼 버렸을까? <중략>
가방의 밑바닥에는 80년 5월의 <쁘라브다> 신문지가 깔려 있다. <위대한 가르침은 영원하리!>라는 커다란 활자의 제목이 보인다. 한가운데에는 칼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있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지도자들을 즐겨 그렸다. 특히 마르크스를. 잉크로 대충 얼룩덜룩하게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엇비슷해지고는 했지……
나는 빈 가방을 훑어보았다. 바닥에는 칼 마르크스. 뚜껑에는 브로드스끼. 그리고 그 중간에 구제불능의 별 볼일 없는 인생 하나가 있다.
나는 가방을 닫았다. 안에서 둥근 나프탈렌 조각들이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에서 꺼낸 잡동사니들이 식탁 위에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이것이 내가 36년 동안 벌어들인 것의 전부다. 고국에 사는 동안 말이다. ‘정말 이게 다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래, 이게 전부군.’하는 답변이 따라 나왔다.
그러자 소위 기억이라고 하는 것들이 밀려 왔다. 그 동안 이 초라한 넝마 가방 속에 숨어 있던 듯싶은 기억들이 이제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거다. <마르크스에서 브로드스끼까지> 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기억들이다. <내가 벌어들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냥 <여행 가방>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어쨌든, 언제나 그렇듯 서두가 길었다.
-<머리말> 中에서…
나는 빚을 지기 시작했다.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11월쯤에는 80루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전당포가 뭔지를 알게 되었고, 더불어 그 영수증과 길게 늘어선 줄, 그리고 슬픔과 가난 따위도 알게 되었다.
아샤가 곁에 있는 동안은 그런 것들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되면, 빚에 관한 생각이 밀려왔다. 마치 먹구름처럼.
나는 암담한 심정으로 잠에서 깨어나고는 했다. 옷도 입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을 그대로 있기도 했다. 보석상을 털까 하고 진지하게 계획해 보기도 했다.
가난뱅이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온통 위법성을 띠기 마련이다.
그 무렵 내 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샤는 예전에도 성적불량이었다. 교학과에서는 우리의 도덕성을 들먹였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빚까지 지게 되면, 그의 도덕성 문제가 거론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핀란드 산 양말> 中에서…
200년 전에 역사학자 까람진이 프랑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이민자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조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마디만 해주실 수 있나요?”
까람진에게는 두 마디까지도 필요 없었다.
그는 <도둑질이오.>하고 대답했으니까…….
실제로 당시에는 절도가 횡횡하고 있었다. 게다가 해마다 점차 증가돼가는 추세였다.
육류 콤비나트에서는 소를 통째로 훔쳐 갖고 나간다. 섬유 공장에서는 방적기계를 훔쳐 간다. 영사기 공장에서는 렌즈가 없어진다.
타일, 석고, 폴리에틸렌, 전기 모터, 볼트, 너트, 라디오 진공관, 실, 유리 등등 닥치는 대로 죄다 훔친다.
때때로 이 모든 것은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띤다. 나는 뭔가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절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런 일은 러시아에서만 벌어질 것이다.
-<특권층 구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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